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윈스턴 처칠/평가 (문단 편집) === 부정론 === 처칠의 역할을 인정하면서도 지나치게 과장되었다고 보는 입장이다. 당시 [[독일]]에겐 [[도버 해협]]을 건너 [[영국]]을 칠 군사적 역량이 없었다.[* [[크릭스마리네]]라는 거창한 이름과 달리 독일 해군의 역량은 처참한 수준이라 [[이탈리아군의 졸전 기록|그]] [[이탈리아 왕립 해군]]에게 지중해의 호위를 부탁할 정도였다. 만약 독일 해군이 [[일본 제국 해군]]의 '''70%''' 정도의 힘만 갖고 있었어도 영국은 엄청나게 고전했을 것이며 심할 경우 본토에 독일군이 상륙하는 상황까지 일어날 수 있었다는 추측이 나올 지경이니 말 다했다.] 오히려 개전 초기 저지대 방어를 위한 [[프랑스]]와의 연합 작전에서 가용 육군 병력의 상당 부분을 상실했다는 점을 생각하면, [[아돌프 히틀러]]의 침략 야욕으로부터 '영국 본토만을' 방어하는 데에는 더 유리했을 수도 있다. 그러므로 처칠이 없었다고 해서 나치 독일이 유럽을 정복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. 일시적인 정복은 몰라도 유지는 불가능했다. 또 본격적인 미국의 개입이 있기 이전에도 소련의 공업 생산력은 독일을 능가하고 있었으므로, 히틀러는 미국을 배제하더라도 유럽조차 정복하기 힘든 처지였다.[* [[모스크바 공방전]]을 승리했더라면 소련이 독일을 완전히 압도하는 이후의 전개는 어렵다고 추측하는 경우도 있으나, 소련의 광대한 영토와 어마어마한 인구, 그리고 상상을 초월하는 자원을 생각하면 모스크바 점령 이후 독일군이 더 밀고 나가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. 그럴 경우 소련과 독일은 한동안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는데, 과연 교착상태에서 소련의 상상을 초월하는 자원을 독일이 감당 가능할지는 안 봐도 비디오.] 더구나 [[프랭클린 루즈벨트]] 행정부는 개전 초기부터 공공연하게 반 독일 성향으로 전쟁에 개입하려는 의사를 드러냈기에 대독평화협상이 이뤄지는 정도가 아니라면 전쟁에 개입을 안했을 가능성이 낮다. 처칠이 2차대전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사실이지만, 처칠이 아니면 독일이 유럽을 정복했을 것이라는 주장은 영웅주의의 요소가 있다. 과거의 역사에서 대체가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경우가 존재한다. [[라이트 형제]]가 없었더라도 [[비행기]]는 발명되었을 것이다.[* [[2016 리우 올림픽]] 개막식에도 소개된 프랑스계 브라질인 산토스 뒤몽도 라이트 형제와 별도로 비행기를 만들었으며 라이트 형제보다 단지 1년 늦게 완전한 비행기를 완성하였다.] 하지만 [[세종대왕]]이 없었다면 [[한글]]은 창제되지 않았을 것이다. 마찬가지로 2차대전을 전후한 인물 중에서 [[아돌프 히틀러]]가 아니라면 구 프로이센 영토를 수복하기 위한 [[폴란드]]와의 전쟁[* 이 정도는 히틀러가 없었더라도 프로이센 군부나 독일 국민들의 반 폴란드 감정이 높아서 충분히 있을 수 있었다. 1차대전 전후에 재건된 폴란드가 주변국 대부분에게 어그로를 끄는 영토 확장 전쟁을 차례로 벌였는데, 혁명 직후의 소련, 패전 직후의 독일, 그 외 신생국가다 보니 내정이 안정되지 못한 차에 폴란드가 치고 들어가면 당하기도 해서 다들 이를 갈고 있었다. 문제는 이 폴란드 침공이 영프가 대전에 참전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거지만.] 정도라면 몰라도 유럽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고 수백만 유태인, 집시, 장애인, 반정부인사들을 가스실로 집어넣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. 하지만 히틀러는 깽판을 치는 입장이고 윈스턴 처칠은 방어자의 입장이었으니 역사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에는 또 차이가 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